물론, 이 시는 제목에서 언급한 김소월의 섹시한 시는 아니다.
김소월의 '별 헤는 밤'과 같은 유명한 시가 아닌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봤던 것이 벌써 10년도 전에 일이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그의 시만 교과서에서 보다가, 노골적인 묘사들이 넘쳐나는 관능적인 시구들을 보면서 그때 나는 충격에 사로 잡혔다.
김소월의 시가 야동보다 섹시할 줄은 꿈에도 상상이나 했을까?
그만큼 상상은 무한하다. 오히려 제한된 것이 무한으로 확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왜 이런 느낌은 여러분도 많이 겪지 않았나? 예를 들어, 만화책에서 봤던 슬램덩크를 만화영화로 봤더니 실망스러웠던 적. 소설책이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그 흥미롭고 나의 상상 속에 주인공들은 영화에서 나의 상상과는 다른 인물이였기에 재미가 떨어지는 것. 이런 경험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봤을 터.
그것은 상상과 현실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으로 받아 들일 수도 있고, 그만큼 상상력이 크거나, 상상 속에 자신이 그려놓은 이미지가 현실에서 그 무엇에 대한 평가에 너무나 지대한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왜 이런 소리를 하냐면, 창업가는 자신의 꿈을 스스로 그리는 Dreamer이기 때문이다.
창업가는 자신이 그려놓은 그 꿈에 의해 즐거울 때고 있고, 그 꿈에 발목을 잡혀 고통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우연히 깨닳을 수 있었다.
전자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고, 후자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후자는 정확하게 자신을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우선 밝힌다. 그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인데, 아님을 먼저 밝힌다.
자신이 그려놓은 꿈에 발목을 잡혀 고통을 받는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자신이 그려놓은 그 이미지에 대한 완고함이랄까? 그 유연하지 못한 완고함때문에 스스로 상처를 받게 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또는, 자신이 그려놓은 이미지 때문에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함에서 오는 고민들을 의미한다. 나는 이 두가지 모두를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경험해보았다.
나 뿐만 아니라 꿈을 먹고 사는 모든 Entrepreneur들이 이런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확고히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연함의 여유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닳았다. 너무 유연해서도 안되고, 아무 때나 유연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어려운 것 같다.
이제 어렴풋이 어떤 부분에서 유연해야되는지 말로 형언할 순 없지만, 직관적으로 감이 살짝 올 것 같다. 어쩌면 이것이 피터드러커가 언급한 '판단'이 아닐까??